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르난 코르테스 (문단 편집) === 온건함 === 에르난 코르테스는 과거 무자비한 침략자로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차차 바뀌게 되었다. 실상 그는 어떤 콩키스타도르보다도 원주민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당시 스페인 지배자들 중 가장 온건하게 그들을 포용했다. 무작정 학살만 벌인 게 아니라 매수와 유도 등 피를 흘리지 않는 수단도 적절히 활용해서 뿔뿔이 흩어져 살던 원주민들이 그들에게 잔혹한 압제를 가하던 아즈텍을 타도하기 위해 침략자인 자신을 돕도록 만들었다. 이 정도면 제국주의 시절의 모든 정복자들을 통틀어도 상당히 온건한 편에 속한다. 어쩌면 코르테스가 무자비한 침략자 또는 학살자로 평가받는 것도 정치력이 코르테스보다 몇 수 아래인 다른 콩키스타도르들과 도매금으로 묶여서일 수도 있다. 사실 이런 평가는 코르테스 입장에서 조금 억울해 할 만도 할 것이다. 다른 콩키스타도르들의 아메리카 식민지 정벌과 비교해봐도 그러하다. 당장 황금 때문에 [[서인도 제도]]의 아메리카 원주민을 대량 학살해서 본국 스페인에서도 비난을 받았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쿠엘라르, 니콜라스 데오반도, 판필로 데나르바에스, [[파나마]]와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등 중미 지역에서 원주민들에 대한 학살과 탄압을 잔인하게 저지르며 지금의 중미 국가들을 식민화한 바스코 누녜스 데발보아와 페드로 데알바라도,[* 이 사람은 코르테스의 부하였다.] 후안 데카바욘, 페드라리아 다빌라, 지금의 [[페루]]와 [[볼리비아]] 등 잉카 제국 일대에서 학살을 벌였던 프란시스코-곤살로 피사로 형제와 디에고 데알마그로, 플로리다, 미시시피, 앨라배마 등 현재의 미국 남동부 지역에서 북미 원주민들을 죽였던 에르난도 데소토, [[칠레]]에서 마푸체족 등 원주민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부려먹으며 식민지 영토 확장을 벌였던 페드로 데발디비아,[* 이 사람은 결국 분노한 원주민 노예들이 일으킨 반란에 휘말려 싸우다가 패배하고 포로가 되어 참수당했다.]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에서 차루아족 등 원주민들을 학살했던 페드로 데멘도사, 파라과이에서 원주민인 과라니족들을 학살하고 탄압한 후안 데살라사르, [[애리조나]], [[텍사스]], [[뉴멕시코]] 등 지금의 미국 남서부 지역에서 아파치족이나 나바호족, 푸에블로족 등 현지 원주민들을 겨냥해 학살과 착취를 자행했던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데코로나도와 후안 데오냐테 같은 다른 콩키스타도르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온건했다. 코르테스는 후대의 이민자들이나 당대의 다른 유럽인들과는 달리 원주민을 인간 이하의 존재가 아니라 충분히 위협적이며 신중히 대해야 할 존재로 보았고, [[가톨릭]] 신앙과 [[식인]] 풍습 철폐만 받아들이면 현지 습속을 강제로 고치려 하지 않았다. 이는 아즈텍 함락 이후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런 관점이 코르테스가 압도적인 전력차를 극복하고 승리한 요인이었다. 틀락스칼라와 토토낙처럼 자신을 도와준 부족들에 대한 신의도 끝까지 지켜주었다. 반면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피사로는 잉카의 학정에 대항해 목숨을 걸고 자신을 도와준 차차포야와 카나리 원주민들을 실컷 이용해 먹은 다음 배신하고, 학살하거나 노예로 삼았다. 코르테스가 본국에 소환당한 사이 그의 엔코미엔다에 속한 원주민들을 다른 스페인인들이 학대하자 멕시코에 귀환한 뒤 그들을 위한 [[https://ko.wikipedia.org/wiki/%EC%9A%B0%EC%97%90%EC%86%8C%EC%B9%9C%EC%BD%94%EC%84%9C|소송장]]을 써주었고 결국 승소했다. 이것은 자신의 영지민으로 편입된 원주민들에 대한 [[봉건제]]적 보호 의무를 수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텍스코코 북동쪽 아콜우아(Acolhua)에 있는 테페틀라오스톡(Tepetlaoztoc) 엔코미엔다는 처음에는 [[코르테스]]가 다스리다가, 그의 심복이었던 디에고 데오캄포(Diego de Ocampo)와 미겔 디아스 데아우흐(Miguel Díaz de Aux)를 거쳐서 코르테스의 가장 악명 높은 [[정적]]이었던 곤살로 데살라사르(Gonzalo de Salazar)에게 넘어갔는데 살라사르의 수중에 들어가자마자 어마어마한 착취를 당했다. 특히 원주민과 정복자들을 잇는 중간매개로 엔코미엔다 지배체제에 편입된 원주민 상층 계급은 기존에 나눠 받던 공물 수입을 살라사르에게 거의 다 빼앗겼다. 그전에 주어지던 옷, 음식, 황금, 연료, 부역 혜택이 사라졌으며 엔코미엔다의 원주민 전체가 멕시코 시에 있는 살라사르와 그의 부인 및 집사들이 살 집을 짓는데 동원되었다. 1530년에는 살라사르가 스페인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원주민들에게 더 많은 공물을 요구했다. 게다가 배에 싣기 위해서 베라크루스로 살라사르의 물건들을 운반하느라 200명이 넘는 원주민이 죽었다. 한편으로는 '''[[메스티소]]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단순히 현지처들과의 사이에서 아들 1명과 많은 딸들을 낳았다고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생아들을 적자로 인정받게 만들려고 상당한 노력을 했으며, 실제로 그 중 4명을 적자로 인정하는 [[교황청]]의 승인을 받아냈다. 유언에서 메스티소 [[사생아]]들과 그 어머니(즉 자신의 원주민 현지처)들의 생활을 챙기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비록 지금의 [[멕시코]]가 [[아즈텍 제국]]과 [[마야 문명]]의 후신을 칭하지만 그것은 명목상이고, 멕시코의 실질적•물질적인 전신은 코르테스가 세운 [[누에바에스파냐]]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이러한 노력은 높이 사야 할 것이다. 스페인의 [[사제]]이자 역사가인 바르톨로메 데라스 카사스가 1552년에 출간한 《인도 파괴에 대한 간단한 설명》(A Brief Account of the Destruction of the Indies) 제5장에서 코르테스를 일방적으로 비난했는데 라스 카사스의 행적을 보면 알겠지만 이 사람은 온 생을 원주민 권리와 생명 보호에 바치긴 했지만 저술에 있어서는 사실 검증도 없이 일방적으로 서술해서 신빙성이 매우 낮다. 이 사람은 정작 아즈텍 정복 시절엔 그 동네에 가본 적도 없었다. 물론 코르테스가 다른 엔코미엔다에 비해 착취를 덜 하고 온건했다 하더라도 그 역시 막대한 공물을 착취하고 자기 영지의 궁전을 짓는 데 원주민들의 부역을 동원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김윤경 (2013), <16세기 아스테카 제국의 정치적 식민화>,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허나 이를 근거로 코르테스를 비판하는 것은 곤란하다. 코르테스는 단순히 16세기의 세계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상식에 따른 것이었다. 애초에 엔코미엔다가 유럽의 봉건제를 멕시코에 이식한 것이었으니, 코르테스가 봉건 영주로서 봉건적인 통치를 수행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렇게 부려먹은 영민들에게 영주로서의 보호의무를 수행한 것은 봉건제의 상식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의 다른 지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즈텍 제국이나 잉카 제국 또한 피지배 민족을 부려먹고 착취했으며, 코르테스의 주군이었던 카를로스 1세 또한 부족한 재정을 매꾸기 위해 스페인과 저지대의 백성들을 상대로 과도한 세금을 매겼다. 오히려 아즈텍, 잉카, 카를로스 1세와는 달리 코르테스의 지배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코르테스가 21세기 기준으로 특별히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그 당시 평균적인 군주들에 비해서는 비교적 유연하고 현명했다고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